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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도 씁쓸한 청나라의 흔적

 
청나라는 중국 최후의 봉건왕조이자 정복왕조이다. 그만큼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독특할 뿐더러 현대 중국과 맞닿은 부분이 많은 관계로 알게모르게 남겨놓은 유산도 적지않은 편이다. 호복과 변발강요, 문자옥이라는 그림자도 짙은 반면 강건치세와 원나라 이후 중국역사상 최대판도의 제국을 이룩한 빛도 찬란한 실로 재미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왕조이다. 그렇다면 어떤 유산이 작금의 중국인들에게 단 것이고 또 어떤 것이 씁쓸한 것일까.

펼쳐보시라 ~

우선 중국인들에게 달고도 단 유산은 다름이 아닌 '광활한 영토'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청나라의 판도와 대부분 일치한다. 중화민국이 청나라를 계승한 국가였으며 더불어 그 영토를 이어받았고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쫓아내어 대륙의 주인으로 정통성을 자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영토들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까지 들먹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외몽골과 연해주 등의 굵직한 영토들은 격동의 시절을 겪는 동안 중국의 테두리에서 벗아났지만 내몽골과 신강, 티베트 등과 같이 청나라때 복속된 영토는 아직도 중국의 영토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영토들을 정복하면서 구축한 다민족국가 청나라의 이미지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재 중국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가장 큰 역사적 기억이 되었으며 그것은 지금도 그 지역이 중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때마다 중국이 주장하는 해당영토점유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만이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할때 중국이 발끈하는 또다른 이유가 된다고도 생각하는데 대만은 다름아닌 청나라때 정식으로 중화세계에 편입된 영토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것은 한족왕조인 명나라의 전성기때 영토이다. 만주와 연해주,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을 제외한 영토가 바로 한족왕조들의 전통적인 영역이었다. 이 영토를 훨씬 뛰어넘은 제국은 당나라가 있지만 그들이 점유한 영토는 온전히 중화세계에 편입되지 못했으며 당나라가 쇠퇴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한족왕조는 언제나 그랬듯이 원래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주변 민족들의 힘이 세지면서 그나마도 지키기 힘들었다. 그 대표적인 왕조가 북송과 남송이며 결국 최초의 정복왕조인 몽골의 원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원나라는 초유의 세계제국인 몽골제국의 중심국가로 자리잡지만 특유의 무지막지한 통치로 인해 100년도 못되어 초원으로 쫓겨나고 한족왕조인 명나라가 세워지지만 한족왕조 특유의 고질병인 주변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다 결국 또다른 정복왕조인 청나라에 정복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복왕조 청나라의 영토이다. 일반적인 한족왕조의 세력권의 몇배나 되는 광활한 영토를 손에 넣었을 뿐더러 중국인들에게 뜻하지않은 선물까지 안겨주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진(先秦)시대 이래 수천년동안 중국인들의 골머리를 썩혀왔으며 수많은 왕조들을 멸망시킨 원인이 된 유목민족들의 문제까지 해결한 것이다. 애초에 청나라가 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한 정복왕조였기에 만리장성이 필요가 없었지만 몽골까지 정복하면서 만리장성은 더이상 군사요충지가 아니라 늑대와 독수리의 둥지신세가 되고 말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에 만리장성을 찍은 사진을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데 이것은 한족이 남긴 유산에 무심해서 그런게 아니라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없었기에 방치된 것이었다. 그나마 달에서도 보인다는 구라와 더불어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현대의 일로 그 이전까지는 그저 남겨진 벽돌더미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벽돌더미로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닌 만주족의 청나라였다. 이렇게 형성된 다민족국가 청나라는 국가운용도 다민족국가답게 타민족을 포용하며 성장했고 운영되었다. 몽골팔기가 만주팔기와 더불어 청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전투력을 자랑했었고 범문정, 홍승주와 같은 한족 지식인을 포용하여 과거제도를 실시했고 이름난 신하 중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에서 골고루 배출된 중국 봉건국가에서 몇안되는 성공적인 다민족국가였다. 물론 이렇게 성공적으로 운영한 이유에는 원나라의 처참한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이유가 크다고 할 수있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청나라는 중국역사에 적지않은 그림자를 남겨주었다. 대표적으로 전세계에 만주족 전통의상과 머리모양을 중국의 전통적인 것으로 전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요동을 정복하여 근거지로 삼을 때부터 호복과 변발강요를 복종의 표시로 삼았는데 관리나 군인부터 일반백성에까지 이것을 강요했고 거부했을 시에는 본인에게는 처형을, 그 식솔들은 노비로 삼는 등의 가혹한 처벌을 서슴치않고 실행했다. 이는 여느 정복왕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는데 그들이 벤치마킹했을 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정책이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의미를 두냐하면 한족에게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정책이었으며 그것이 정착됨에 따라 수천년을 이어온 한족 고유의 복식문화의 명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끊어진 속발의 명맥은 이어지지 못했는데 청나라에 반하여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서 태평천국에 속했던 사람들이 속발로 청나라에 저항한다는 표시를 한 것이 아니라 장발을 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차이나드레스로 알려진 치파오는 원래 만주기인들이 입었던 옷이었고 기인이 아닌 사람들이 그것을 입는 것은 엄금했었던, 한마디로 선택받은 상류층만이 입을 수 있었던 옷이었다. 그것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청나라가 무너지면서 민간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옷을 일반인들이 하나둘씩 입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의상 중 하나로 알려지게된 것이었다. 강제로 이식된 문물도 수백년동안 이어지면 또다른 전통으로 자리잡듯이 변발도 사라져가는 봉건유산을 드러내는 표시가 되었고 민국초기 수많은 사람들이 호복을 입고 다닌 것도 청나라의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변발과 호복과 더불어 청나라가 중국에 지울 수없는 그림자를 남긴 것은 문자옥이었다. 그 이전에 청나라때 관료제도와 한인관료선발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한도 내에서 간단히하면 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고 만주족과 한인의 비율을 비교적 공평하게 분배했지만 한인들에게 결코 커다란 실권을 주거나하지 않았다. 물론 한인으로 구성된 팔기가 있었고 아예 명나라 투항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녹영이라는 군사조직이 있었지만 그들이 결코 군사적 실권을 크게 쥘 수는 없었다. 한인들에게 군사적 실권이 넘어간 것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증국번과 이홍장이 반란을 평정하면서 부터였다. 또한 한인들은 관료로 선출은 되었지만 만주족 관료들이 의자에 앉을때 그들은 무릎을 꿇어야했고 이러한 굴종을 참고 이길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애초에 그것을 초탈한 사람들이 관료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변발과 호복강요로 한인들에게 심겨진 굴종감과 수치감은 이렇게 상류층에게도 뿌리깊게 심겨졌던 것이었다. 또한 청나라는 심심하면 문자옥을 일으켰다. 명나라 때에도 문자옥은 일어났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청나라는 거기에 민족주의적인 요소까지 결합시켜 수많은 무고한 지식인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고 그 식솔들을 노비로 만들었으며 이미 죽은 사람들의 백골마저 흩어버렸다. 이렇게 명나라때부터 사그러들기 시작한 창조적인 기운은 청나라때 그 뿌리가 거의 죽어버린 것이었다. 청나라때 고증학이 유행한 것이 괜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봉건국가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지식인들마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고 그 유산은 아직까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서슴치않고 벌이는 현대 중국도 어느 정도 계승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강건치세를 강조하며 청나라의 빛만을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림자를 간과하기 쉬운데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가 아닐까.

청나라는 현대 중국의 근본이 되는 국가로 좋든 싫든 중국인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긴 국가이다. '하나의 중국'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었고 한족문화를 파괴하고 그 어떤 정복왕조도 하지 못했던 정신적인 굴종까지 이끌어낸 원나라가 가지지 못한 교활함까지 유감없이 보여준 실로 달콤쌉쌀한 흔적을 남겨놓은 왕조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한족왕조의 전통인 옛왕조의 궁전을 부수고 새궁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명왕조의 궁궐이었던 자금성을 재활용(?)한 덕분에 오늘날 그것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유산이자 관광자원이 되었고 우리는 그 덕분에 중국역사의 변화무쌍한 부분마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금성이야말로 청나라가 우리에게, 그리고 중국에게 남겨놓은 유산의 대표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그 모습은 한자와 만주어가 병기된 현판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중국근세사를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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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man | 2009/04/13 21:56 |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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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크라켄 at 2009/04/13 23:48
뭐 전통이란게 다소 무리하게 "만들어지는"것이라는건
꼭 중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곱씹어보면 볼수록 우리가 중국하면 연상 되는것은 청나라의 잔재가 많긴 하네요
Commented by 낭만여객 at 2009/04/14 00:43
오늘도 많이 배웠습니다.
Commented by 마륵시 at 2009/04/14 01:51
잘 읽었습니다.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만치 간결하고도 알찬 설명이십니다.
전통이 교체되는 데에는 한 세대만 흘러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3세대 정도가 흘러가면
이전의 전통이 오히려 낯설어집니다. 누구에게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배운 것이 전통이지요.
'원래의 전통은 그런 것이 아냐.'라고 역사의 연원을 밝혀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04/14 09:35
따라서 누르하치부터 건륭제 까지의 청 황제는 중화영웅이겠군요(...)
Commented by 뽀도르 at 2009/04/14 14:31
칭기즈칸도 중화영웅으로 묘사한 드라마가 있더군요.
Commented by 눈팅 at 2009/04/15 06:48
청나라가 중국의 산타 클로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도 악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목 요연하게 보여 주십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 밑에서 세 번째 문단 중 "기인이 아닌 사람들이 그것을 입는 것은 엄금했었던" 에서 "기인"은 귀인의 오타가 아닌지요? 상류층 사람이라는 말을 보면 기생을 의미하신 것 같지는 않으셔서 문의 드립니다.
Commented by oldman at 2009/04/15 06:57
기인(旗人)은 청나라때 팔기에 속했던 사람으로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상류층 사람들이었습니다. 팔기도 그 나름대로 등급이 있었는데 치파오는 그 중에서 만주팔기에 속한 사람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기생들이 입기 시작했다면 아마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 근대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올때 입기 시작했었을 것입니다.
Commented by 나도사랑을했으면 at 2009/05/06 11:11
중국 역사에 특히 청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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