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간만에 이어서 거의 모든 이웃분들이 전 이야기를 까먹었을 연재물에 대한 마무리입니다.
러시아는 이제 노골적으로 아무르강을 오가며 항해를 하고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지만 중국은 적극적인 대응을 할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태평천국의 난과 프랑스와 영국의 공격으로 인하여 문자 그대로 내우외환을 겪고있던 상황이라 변방(?)의 영토에 대해서 그리 적극적으로 대응할 정신적, 물리적 여력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청나라는 러시아와 결국 국경을 재조정하는 협상에 응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1858년 5월 아무르 강이 바라다 보이는 아이훈의 만주족 마을에서 준비되었습니다.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을 입은 무라비요프와 황제의 조카 혁산은 서로 연회를 즐기면서 덕담(?)을 나누면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무리비요프는 모든 황실 가족의 안부를 물었고 아무 생각없이 말하듯
40대의 하천용 전함을 건조하는 일이 지겹다고 하면서 트란스바이칼리아의 자신의 거처로 그를 초대했습니다. 만주족 귀족들은 그의 훌륭한 재주에 대해 무라비요프를 칭찬했지만 강둑을 끼고 집결해있는 30만 명에 이르는 군인들의 진영이 발견되어 불거진 문제를 이유로 그 초대를 정중히 사절했습니다.
본격적인 협상은 다음날 진행되었습니다. 중국식의 미묘한 말들은 가뜩이나 군인으로 외교적 수사에 익숙치 못했던 무라비요프의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었습니다. 혁산이 주장했던 군대가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무라비요프는 군인답게 일종의 최후통첩으로 미묘한 교착상태를 깨뜨립니다. 그는 그의 통역자가 무라비요프의 말을 통역하기 전에 회의장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아무르 강 둑 위에서 그를 기다리는 보트로 달려갔습니다. 강 위로 폭풍이 불어 닥쳤고,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혁산의 비서 - 참고문헌에는 이렇게 쓰여져있던데 아마 이 표현은 영어식 표현을 직역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다 더 적절하게 본 직급을 표현하는 말을 아시는 분들께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필자주) - 는 급히 그의 뒤를 쫓아가 험악한 날씨에 그런 허술한 배에 몸을 실어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며 그의 주인의 이름으로 간청했습니다.
화가 난 무라비요프는 밖으로 나아가면서 옆에 있던 선원들이 놀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회담 전에 그의 가슴에 달았던 알렉산드르 2세의 훈장인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튿날 혁산은 무라비요프가 폭풍 속에서 무사히 돌아갔는지 예의 바르게 물어본 뒤, 다소 성급하게 입안된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아이훈 조약'입니다. 그 조약은 러시아인과 중국인이 아무르 강, 송화강, 우수리 강에서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음을 규정하였습니다. 아울러 우수리 강과 바다 사이의 영토는 두 제국의 '공동 소유'라는 애매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에게 그 영토를 내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1860년 약 4만명의 기동대원과 농부들이 그곳에 정착했고 같은 해 베이징에서, 그 지역 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접경까지 뻗어있는 긴 해안 지역도 러시아에게 내준다는 내용의 조약도 체결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베이징 조약'이었습니다.
(중국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보이는 지도. 빗살무늬가 아이훈 조약때 러시아가 먹은 영토, 줄무늬가 베이징 조약때 추가로 먹은 영토, 사할린이 왜 먹혔던 영토로 포함되었는지는 논외로 합니다.)결국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연해주 영토를 얻었고 본격적으로 만주를 탐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을 삼고자 이곳에 그 유명한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고 이곳은 러시아를 상징하는 군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청나라는 당시 북쪽의 영토를 떼어 왕조를 유지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때는 몰랐지만 앞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은 물론이고 청나라 및 동아시아에 두고두고 위험요소를 심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연해주에 대한 상실감은 베이징 조약이 맺어진지 100여년 후에 일어난 중소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참고로 2005년 중국과 러시아는 연해주 국경문제는 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니 일단은 두고보는게 좋지않을까 싶습니다.
이 사건으로 크게 한방 얻어맞은 청나라는 변경 지방에 본격적으로 한족의 이민을 허락합니다. 한족을 중원 지방에 가두려는 정책이 얼마나 삽질이었는지 깨달은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한족의 변경이민러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러시아에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무라비요프는 여러해동안 연해주 생활로 허약해진 건강으로 인해 사임을 요청하고 그것은 받아들여집니다. 그는 차르로부터 아무르스키 백작이라는 작위와 행정 재판소 위원이라는 명예와 벼슬을 받지만 어떠한 지위도 수락하지 않고 파리로 떠나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몇번 러시아에 들르기는 했지만 시베리아에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러시아는 동아시아 세계에 편입되었고 무라비요프의 모험은 끝이 났습니다.
참고문헌
1.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청제국 말(1), 조지프 플레처 著, pp.610 - 611
2. 지안나 과달루피 著, 이혜소, 김택규 옮김 '중국의 발견', pp.208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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