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밸리에 유명하신 분들께서 이러한 주제로 좋은 글을 올려주셨더군요. 잘 차려주신 밥상에 숟가락 얹는 심정으로 저도 졸필을 풀어보렵니다. 다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과 '주관적'으로 선별한 것이기에 여러 제현들의 관점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며 즐겁게 감상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1. 아드리아노플 전투서기 376년 훈족의 압박에 못이긴 서고트족은 동로마황제 발렌스에게 정착을 허락해달라 요청합니다. 발렌스는 그들이 다키아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와 모이시아 남부(불가리아)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해주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군사력의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이전에도 라인이나 도나우 강 너머 종족들을 용병으로 채용하는 일도 있었기에 그들의 정착을 군사력 보충의 좋은 기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트라키아 총독이 서고트족을 핍박하고 과중한 세금을 물리면서 이들의 밀월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서고트족은 마라키아노폴리스로 넘어가서 트라키아 총독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군사력으로 서고트족을 제압하려다 패배하고 맙니다. 이에 발렌스는 서로마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중장보병 4만, 경기병 2만의 병력으로 아드리아노플 외곽에서 서고트족과 맞섭니다. 발렌스는 전통적인 로마식으로 중앙에 군단을 집중배치하고 양익에는 외인 부대 기병을 배치하여 공격을 개시했으나 그들은 서고트족 기병이
약탈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습니다. 서고트족 기병들은 즉시 돌아와 로마군의 좌익을 공격하여 즉시 붕괴시키고 계속 밀어붙여 로마 보병을 포위하였습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로마 보병들은 그대로 학살당하고 동로마황제 발렌스도 그 중 한명이 됩니다. 이 전투는 보병에 대한 중장 기병의 첫 승리라는 전쟁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음과 동시에 로마와 이민족간의 힘의 균형이 깨어버린 사건으로 크게 기억에 남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첫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 살수대첩<민족기록화 - 살수대첩>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대규모 침략을 거행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국이 분열을 마치고 했던 행위들은 주변국 - 특히 한반도- 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가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실패하고 그의 아들 양제가 황위에 오르면서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100만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하지만, 양제의 생각과는 다르게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수군마저 고건무(후일 영류왕으로 즉위)에게 패배함으로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한편,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사자를 보내서 고구려 왕이 수 양제에게 항복한다는 거짓정보를 흘렸고 수나라 군은 이 정보를 믿고 요동으로 퇴각합니다. 이때 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되는 살수를 막았다 수나라 군대가 오자 터뜨려서 30만에 가까운 수나라 군사들을 물고기밥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퇴각한 인원이 2700여명 정도였다하며 이후 수나라는 다시 침략을 하지만 양현감의 반란 등으로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실패하였고 고구려 원정은 양제는 물론이고 수나라의 멸망을 초래합니다. 신흥대제국 수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고구려도 대단히지만 이때 소모된 국력이 만만치 않아서 그 이후에 등장한 당나라에 멸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7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지축을 뒤흔든 사건이라 봅니다.
3. 만지케르트 전투<프랑스 버전의 만지케르트 전투>
동방을 지배하였지만 이슬람의 거센 물결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빼앗기고 소아시아와 발칸반도만을 남기며 명맥을 이어갔지만 그래도 동방의 강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 이 제국에 황혼을 드리우는 그림자가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들은 투르크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지를 점령하여 셀주크 제국이라 불리우는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이들의 칼끝은 당연히 비잔티움의 자원의 보고인 소아시아였고 그들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비잔티움의 내정상황은 안습이었는데 돈을 아끼기 위해 용병을 모집하여 사용한 후 바로 해산시켰으며 병사들의 질적저하는 계속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로마누스 4세는 무리한 원정을 단행했고 반 호수 근처 만지케르트에서 알프 아르슬란의 계략에 걸려 패배하고 맙니다. 로마누스 4세는 알프 아르슬란의 포로가 되었지만 협상을 거친 끝에 풀려납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에게 진짜 수난은 다가왔으니 눈이 뽑혀 섬으로 추방되고 그때 입은 상처로 죽게됩니다. 비록 당시 전투의 영향은 대참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을 꼽는 사건으로 이 전투를 꼽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후폭풍이 엄청났습니다. 이때 이후로 투르크족은 소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원의 보고 소아시아를 영원히 잃게되고 결국엔 멸망에 이르고 맙니다.
4. 빈 공방전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파죽지세로 발칸반도를 점령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꾼지 100년도 안되서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를 능가하는 판도와 위세를 가지게 됩니다. 오스만 역사상 위대한 술탄이던 쉴레이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향하여 침략을 단행하였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오스만은 유럽인들에게 천하무적의 이미지였고 신의 형벌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의 넘치는 자원과 기세로 빈은 함락될 것같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공성전 준비를 탄탄하게 하고 있었고 오스만 군은 오랜 원정으로 지쳐있었고 공성전에 적합하지 않은 경기병대를 보유함으로서 승패를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군은 참호와 땅굴을 파면서 공격을 단행했지만 폭우와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내린 폭설로 인해 오스만 군은 대형을 잃고 퇴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오스만의 손실은 심했습니다. 무적이라 여겨졌던 오스만을 패배시킨 오스트리아의 사기는 올라갔고 이후 벌어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의 기세는 한풀 꺾입니다. 비록 100여년 후 빈에서 또 한번의 전투가 벌어지지만 이전과 같지 않았고 그 이후 오스만은 유럽에 대해 공세를 펴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서서히 몰락하고 맙니다.
5. 사르후 전투1619년 명나라와 후금(청)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로 명나라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전투입니다. 명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여진족(후에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꿈)은 서서히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명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서서히 명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목표가 된 것이 명나라의 중요한 국경지대였던 요동이었고 사르후 전투는 그 요동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161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요동의 명나라 거점인 무순을 점령하였고 악명높은 변발강요와 한족들을 죽이고 노예로 만들어버림으로서 명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습니다. 명나라는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리한 누르하치는 명나라 전체와 싸우기 보다는 각개격파 전술을 택합니다. 비록 명나라 전체 군사 수는 10만이었지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오면 그 숫자가 분산되고 주력인 1만 5천으로도 승산있는 전투가 가능하다 판단하였고 그 결정은 매우 옳은 것임이 판명되었습니다. 명나라 군사는 처참하게 박살나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유정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전사합니다. 이 전투 이후로 명나라는 후금에 대해 수세에 몰렸으며 요동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음은 물론이며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황제가 그 유명한 만력제였고 이 전투가 일어난지 1년후 죽음을 맞이합니다.
6. 황해 해전<황해해전을 묘사한 일본의 그림>
비록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홍콩을 할양하였고 청-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청나라는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무시하지 못할 강국이었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변방이었고 메이지 유신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하였으나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군사력에 대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는 북양대신 이홍장이 중건하였던 북양함대의 위용으로 눈부시게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황해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함으로서 양무운동의 겉핥기식 근대화 운동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냄과 동시에 중국의 허약함을 전세계에 알리는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태후가 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대포알이 부족했다는 일설을 얻었고 수천년간 동아시아, 특히 조선에서 누려왔던 종주권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 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쓰시마 해전 <쓰시마 해전에서의 도고 헤이하치로>
청나라를 제패함으로서 일본은 욱일승천의 기회를 얻지만 서양열강, 특히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의 방해로 대만을 얻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조금 더 챙기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러시아는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위협적인 대제국이었고 일본은 청나라를 이겼다고는 하나 아직은 검증이 덜된 신흥산업국이라고 서양열강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과 만주(특히 요동반도)를 놓고 갈등을 벌이게 되었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육전과 해전을 통해 두 나라는 피터지게 싸웠는데 이 가운데서 일본을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전투가 바로 1905년 쓰시마 해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여순항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서 대서양을 거쳐 아프리카 남단, 동남아시아를 지나서 쓰시마에 이르렀는데 문자 그대로 지구 반바퀴도 넘게 돌아서 온 대여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희생도 만만치 않았고 영국어선을 일본해군소속으로 착각해 공격함으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는 순조롭지 않은 항해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시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함대에게 발트함대는 사실상 전멸당하고 맙니다. 러시아가 분명히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전세계인에게 이 사건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인종상 우월하다 생각했던 백인종이 황인종에게 패배한 사건이며 전통강호 러시아가 몰락에 이르는 시초가 되는 전투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정지으며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물러남은 물론이고 10여년뒤 제국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8. 미드웨이 해전'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바다에서 흥한 일본은 바다에서 망하게 되는데 그 시발점이 된 전투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습니다. 진주만 기습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미국의 해군력을 제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더군다나 둘리틀 폭격대의 일본 본토공습 때문에 충격을 받은 일본 군부는 미 해군 최전방기지인 미드웨이를 일본의 최전방기지로 삼을 계획을 삼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해군의 주력을 투입하여 전투에 임했고 이때 참전했던 항공모함 함재기 조종사들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겪은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고 니미츠 제독은 야마모토의 목표를 정확히 간파하여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해군은 패배하였고 미 해군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에도 3년간 일본은 버티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애초에 자원자체에 차이가 많았으며 전투를 치룰수록 경험많은 베테랑이 사라지고 자원이 부족함에 본토폭격까지 당한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하는데 그 시작점을 찍은 것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수에즈 전투<수에즈 운하>
영국의 식민지였고 이후엔 속국이었던 이집트를 다른 의미로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가말 압델 나세르입니다. 1952년 왕과 그 이후에 그가 세운 나기브 대통령도 몰아내고 이집트의 최고지도자가 됩니다. 이후 미국의 원조가 중지되어 아스완 댐 건설자금이 부족해지자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운하를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반발이 있었고 이에 동조한 프랑스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였고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연합의 철군요구와 세계여론의 압박에 이 세나라는 곤경을 겪게 되었고 결국 군대를 철수하고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비록 승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길게는 수백년에서 짧게는 100여년 동안 전세계를 지배했던 패권국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였고 식민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계기를 만든 중요한 전투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0. 디엔비엔푸 전투<포로로 끌려가는 프랑스군>
수에즈 전투가 대영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면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이 점령하여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잃은 프랑스는 일본 패망이후 다시 베트남에 들어와서 예전처럼 식민지배를 하려 하였으나 베트남에서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특히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호치민 정권과 맞닥들여야하였습니다. 프랑스는 하노이 일대에서 라오스 삼각주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디엔비엔푸에 주둔지를 설치하는데 그 유명한 보 응우엔 지압(보구엔지압으로 알려진 장군)의 탁월한 전략이 빛을 발하는 전투였습니다.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 특히 미국의 지원을 믿고 있었던 프랑스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전투에 임한 베트남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섬멸당하였고 그나마 포로로 잡힌 사람들도 행군 도중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다수였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프랑스는 이 전투를 끝으로 초라하게 물러갔으며 뒤이어 들어온 미국도 초라하게 물러나고 맙니다. 식민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민족주의 국가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전투였습니다.
이외에도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전투는 많을 것입니다만 기회가 되면 다른 제현분들께서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제가 또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보니 정리도 되고 저 자신이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는 것도 참 오래간만입니다. 제가 길게 글을 쓰게 만드신 계기를 마련하신 여러 제현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ps. 써놓고보니 대부분은 몰락의 계기가 되는 사건을 언급했군요...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