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를 먹다 (1)러시아, 연해주를 먹다 (2)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미 내용을 잊으셨을 분이 많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했던 이야기의 방점을 찍기 위해 달려갑니다.
가려둡니다.러시아가 연해주를 향해 손을 뻗칠 무렵, 청나라에게 연해주는 단순한 변방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땅이었습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청나라를 통치하던 만주족의 발상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곳에 만주족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고자 한인(漢人)의 이민을 막으려는 봉금령을 실행하였지만 실제로 이 법은 그리 엄격하게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한족 인구들 덕분에 1800 - 1850년 사이의 지린(吉林)성의 인구는 두배로 증가하였고 청나라는 이곳에 만주족의 특성을 유지하고자 수도인 베이징에 거주하던 가난한 만주 기인들을 지린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합니다. 조정은 이들에게 농지를 주고 5년간 면세혜택을 주는 등의 혜택을 베풀었지만 효과는 그리 좋은 편이 못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수가 들어와있었던 한족 정착민들은 농지를 개간하고 한족 상인들은 허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활발히 교역을 하였고 기업가는 아편 무역이나 요새처럼 세운 고량주 공장의 운영 등 각종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만주는 19세기 후반 흥겨운 시절을 구가하고 19세기 하반기에는 한족 신사 계층이 출현하는 등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마련해갔지만 이것은 토착 만주인들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이들은 한족이 아무도 없는 땅에 정착하고 이주한 만주인들이 농지 등을 매입하며 사냥과 고기잡이 등으로 토착민들과 경제적인 경쟁관계를 유지하면서 토착민들은 부채와 가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화려해보이는 만주의 한족화는 알맹이가 없었는데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는 러시아의 손길을 막을 정도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진출이 심화되는 19세기 중반에도 아무르 강 우안에는 청나라 백성들이 띄엄띄엄 거주하고 있었고 아무르 강 좌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보더 더욱 적었습니다.
각종 탐험의 성공과 관심의 증가로 연해주에서의 러시아의 입김이 더욱 강해지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입김은 약해져 갔습니다.
본래 지린성 및 헤이룽장성에 각각 1만명은 족히 있었던 청의 수비대는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한 이후 이곳에 있던 부대의 대부분을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한 이후 만주 및 연해주의 방어력은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이러한 결과 무라비요프와 같은 러시아 세력이 이곳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녀도 가로막을 세력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훈(지금의 아이후이[愛輝])의 주둔군은 1000명 남짓밖에 되지않았고 장비도 모잘것 없었는데 당시 이들을 묘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창 대신 끝을 검게 칠한 장대를 들고 있었고, 화승총을 소유한 자는 소수였으며 대부분은 활과 화살통을 등에 메고 있었다.
또한 "아주 조잡한 기술로 만든 진홍색 포가(砲架 - 포신을 올려놓는 받침틀) 위에 탑재된 대포도 몇 문 있었다."라는 기록도 있었다고 하니 이곳의 방어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청나라는 국경선의 확정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무라비요프가 영불연합군과 충돌했던 시기는 태평천국의 난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무라비요프 탐사대에 저항하기에도 청의 능력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태평천국의 난이 만주 및 연해주에 안겨준 결과는 팔기군 뿐만 아니라 성(省)의 재정을 고갈시켜 이곳에서 진행되던 한족의 활동에 대한 조정의 각종 통제를 느슨해지도록 만들었으며 변경 지역에 도적 떼가 들끓고 공공질서가 붕괴되는 현상을 야기했습니다. 병력이 부족해진 청 조정은 팔기군의 연례적인 사냥도 정지시켰지만 이러고도 경비를 마련할 수는 없었고 얼마 후에는 병사들에게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엄하게 적용되던 규칙이었던 만주족이나 몽골족이 아니고서는 군정 장관이 될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 한족을 그 자리에 앉힙니다. 또한 부족한 재정을 벌충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만들고 관전과 군전을 개척하는 등의 재정정책을 폅니다. 청 조정은 인삼 수익으로 병사들의 급료를 지급하기 위해 한족들에게 인삼 채취권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한족 기업가들에게 금광과 은광 채굴권을 허락하고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적인 금 채광이 엄청나게 난립한 관계로 결국 금 채굴을 금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만주를 안정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더군다나 청 조정은 만주 변경의 방어보다는 중국 본토의 안녕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에게 만주에 나타난 불청객인 러시아는 분명 위험한 존재였지만 당장 자신의 발밑을 위협하는 태평천국보다는 그 위험도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고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연해주를 포기할 마음을 먹기 시작합니다. 한화(漢化)가 이미 많이 이루어진 베이징의 만주족에게 만주는 더 이상 그들의 발상지가 아니라 그저 변경이었을 따름이었나 봅니다.
-계속-
다음편에는 만주 변경의 뒤바뀐 운명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캠브리지 중국사 10권, 청제국 말(1), 조지프 플레처 著, pp.586-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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